밀양박씨의 유래

밀양 박씨를 포함한 모든 박씨는 신라 건국자인 박혁거세의 후손들이다.
한자를 보면 木(목) 점卜(복)의 결합이다. 나무로 점을 친다는 뜻인데, 다른 제정일치 사회와 같이, 고조선의 단군이나 유대교의 아브라함, 이슬람 시조인 무함마드처럼 신라 시대 내내 신라인들의 시조로 숭상되어 왔다.
초창기 신라(서라벌) 6촌 백성들의 지도자이자 제사장으로 선출되었던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금척 전설이 내려오고, 김, 석씨 왕들이 혁거세를 시조로 여겨 신궁에서 제사 지낸 것은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왕실에서 주관하여 세종때 경주 숭덕전을 세워 이를 이어왔고, 임진왜란 이후엔 박씨 선비들이, 현재엔 오릉보존회 등의 단체들이 해마다 봄, 가을에 모여 혁거세에 대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박씨는 신라 초기에 7명, 후기에 3명, 총 10명의 신라왕을 지냈다. 밀양 박씨는 크게 절대다수인 일성왕계와 소수인 파사왕계 중에 일성왕계로 분류되며 경명왕의 제1왕자인 30세 밀성대군 박언침(密城大君 朴彦忱)을 도시조로 한다.

고려 개국 시점에, 밀성대군이 아버지 경명왕으로부터 분봉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밀양과 경주시 일부 등 영남에 기반을 둔 신라계 유력 호족중 하나였고, 밀성대군의 아들 박욱이 기인 제도로 삼한벽상공도대장군으로 고려조정에 출사해 개경에 진출했다,

박욱의 7대손 박언부는 고려의 황금기였던 문종 치세 때 태사중서령을 역임하고 문하시중에 올라 당시 최충 등과 함께 명재상 반열에 올랐다. 이후, 좌복야 박언인, 밀직부사 박양언, 판도판서 박천익, 삼사좌윤 박을재, 도평의사사사 박언상 등등 고려 역사에서 가장 태평성대에 주요 관직에 후손들이 이름을 올림으로써 이름이 있는 문벌귀족이 되었다.

비록, 권신이나 왕비를 배출해 중앙정계에서 강한 권력을 휘두르거나 재상지종가문은 아니였으나, 개경에서 가까운 경기, 패서 일대에 기반을 둔 유력 문벌귀족들에 비해서 결코 떨어지는 집안이 아니었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쓴 송나라 책인 고려도경에 이들이 언급이 될 정도로 영남 기반의 실력이 있는 문벌귀족 집안이였다.

신라 말엽부터 경주 땅은 박씨의 영향력이 강했다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신라 말기의 영토가 경주 일대로 축소되어 김씨들의 기반이 거의 날아갔는지 이 시점부터 박씨 왕들이 새로 나오기 시작했고, 김현승의 김씨 복위반란으로 경주 안에서 시가전이 일어났지만 박씨인 경명왕이 이를 진압해 지배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 결정적 근거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씨 왕들의 무덤이 몰려 있는 경주 남산 서쪽면 배동일대에 경애왕릉, 배동 삼릉, 오릉, 박씨의 성지인 나정과 경애왕이 피살당한 제사용 연회공간인 포석정 등 박씨와 역사적 연관성이 높은 유적들이 대거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이쪽 구역이 박씨와 특별히 연관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대몽항쟁 이후, 고려 정부가 원나라의 식민통치를 받아들여 진도군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밀양 군민들이 고을 부사를 죽이고 청도군까지 세력을 넓힌 후 삼별초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건이 있는데, 이때 밀양 박씨가 그 배후세력의 핵심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당장 드러난 주동자 5명 중 3명이 박씨다(박평, 박공, 계년, 방보, 박경순). 삼별초는 진압되고 이후 밀성은 반역의 땅으로 낙인되어 귀화부곡(歸化部曲), 즉, 천민들이 사는 ‘부곡’으로 바뀐다.
이후 복권되지만, 군이 현이 되고 다시 군이 되는 등 원간섭기 꽤나 수난을 겪는다. 그런 와중에서도 오히려 밀양 박씨는 권문세족들이 강성하던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며 인재들을 배출했으며, 절묘하게도 반원자주를 국가정책으로 밀었던 공민왕시기에 정점에 달했다.

충렬왕 때 급제한 후 내부시승에 임명된 충헌공 박척, 판전교사사로 봉해지고 원나라로부터 문하찬성사로 증직받은 박원, 전법판서 박천명, 사헌부 규정 박현, 대제학 박중미, 박광후, 박윤겸, 공민왕 때 장원급제한 성균관대사성 박의중, 고려군 1만명을 이끌고 왜구의 전초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박위, 공민왕때 문하시중을 지낸 박득중, 고려 때 호조전서였으나 조선 개국 후 두문동 전설에서 죽었다는 박침, 박침의 아들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참찬의정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세종에게 딸을 후궁으로 시집보낸 박강생 등이 있다.

고려말 정국군파 중시조 박위가 대마도를 정벌할 때는 군사 1만명과 전함 100척을 동원했는데, 기록상 고려 중앙군이 긴 전란으로 궤멸되고 다른 신흥무인들이 정벌을 주저할 때, 박위와 박천 등 개인 사병들이 주축이 되어 먼저 출항하고 여러 다른 신흥무인들의 합세를 나중에 받은 것으로 보아 당시 밀양 박씨가 고려 내 크고 작은 신흥무인들 사이에서 구심점이 되어 세력을 이룰 정도의 경제, 군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주목할 만한 점은 정벌 이후 류큐 오키나와 왕국이 고려에 신하가 되려고 특산물 등 조공을 보냈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이후에도 조공을 바쳤으며 이 시기 부터 조선과 오키나와는 교류하기 시작했고, 낙후되어 있던 오키나와의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 이후 규슈 다이묘였던 시마즈 가문의 정복으로 일본 영토가 되기 전까지 200여 년간 교류한다.

고려말 당시에 규슈 지방 토착 봉건 영주들이 정벌 얼마 후 사신을 보내 고려에 저자세를 취하며 접근해왔으며 1390년엔 규슈절도사가 조공을 바쳤던 기록이 있고, 1391년엔 규슈에서 고려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등 성과들을 거두었다.
이들은 일본 남조 잔여세력으로 규슈는 고려 말 왜구의 발흥과 직접 연관있는 아지트였다. 이들은 꽤나 무장한 정규군이면서도 교토 인근까지도 약탈하는 등 자국내에서도 상당히 악명 높은 해적이었는데, 일단 머리를 숙여온 것이다. 이 시기 대마도 정벌은 확실히 밀양 박씨의 공이 크다.

고려말 규정공파 박현의 후손들이 조선조에 유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고 현재 각파별 인구면에서도 가장 많다.

밀양 박씨는 조선 개국 이후 518년 통틀어 문과 급제자가 261명, 무과 급제자 1125명, 상신(相臣) 1명, 대제학(大提學, 문형) 2명, 청백리(淸白吏) 2명, 공신 6명, 생원진사 756명을 배출하는 물량전을 선보였다.

밀양 박씨는 260명을 넘는 문과 급제자 숫자에 비해 정승이 광해군 때 숙민공 박승종(영의정) 한 명이다.